2/26 주일설교, ‘떨기나무

2023-02-26 주일설교

본문: 출애굽기 3:1-5

제목: 산불

하나. 그는 장인 이드로의 양을 쳤습니다.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쳤더라”(출 3:1).

우리는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자기 양 한 마리도 없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아내의 가족과 함께 살았지만 자신의 양 떼를 치는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야곱처럼 자고 깨지만 양 떼를 모으는 야곱과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늘의 상을 고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오히려 그들은 일시적인 죄의 기쁨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굴욕을 생각하면 애굽의 모든 보물보다 더 큰 재물이로다.

상을 바라며”(히 11:24-26).

파라오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부함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던 정치 권력과 왕권을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파라오 공주의 아들은 대이집트 제국에서 파라오의 왕위 계승을 위해 싸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일시적인 죄의 쾌락에 목숨을 걸고 사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선택했습니다.

그 고난은 그리스도께 대한 모욕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사람입니다.

고난의 굴욕과 영광의 부여는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고난 없는 면류관은 없습니다.

아니 십자가 아니 왕관!

모세는 이집트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집트를 떠날 때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처럼 인내했습니다.

수치는 이집트의 모든 보물보다 더 큰 부로 여겨졌습니다.

수상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굽의 모든 보물을 얻기 위해 영혼과 가족과 충성을 팔아먹는 세상에서

상상할 수 없는 부진이었고, 아무 생각 없이는 할 수 없는 미친 거래였다.

애굽의 모든 보물을 얻기 위해 교회는 강도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약탈하는 이리가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과 악독으로 채우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다 악하니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보응하리라

내가 보았노라 – 바알을 신뢰하는 사마리아 선지자들의 어리석음을 내가 보았노라

예언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그릇되게 인도하였다.

나는 예루살렘의 예언자들 중에도 간음하고 거짓말을 하는 가증한 일을 보았다.

내가 악을 행하는 자의 손을 강하게 하여 백성이 그 악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

내 앞에는 다 소돔 같고 그 거민은 고모라 같으니라”(렘 23:11-14).

교회를 왜곡하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은 교회의 선지자와 제사장들이다.

그들은 이 백성에게 무익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헛되이 일컫는도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주님의 말씀을 도적질합니다.

모든 악이 예루살렘 선지자들에게서 나와 온 땅에 퍼지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불 같고 방망이가 바위를 부수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아무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은밀한 곳에 숨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이지 결코 멀리 계시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 충만하시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고난과 굴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귀하게 여겼으니 이는 상급을 바라보았음이라.

광야에서 큰 고난을 당하는 날에도 우리도 상급을 기다리나니

그리스도를 위한 수치는 애굽의 모든 보물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겨져야 합니다.

내 양이 없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내 소유와 환경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처가와 함께 살면서 80세까지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쳤던 모세를 기억합시다.

성령의 생각으로 말씀대로 살면 결국 모세처럼 상급을 경험하게 됩니다.

머지 않아 당신은 보상을 거둘 것입니다.

“너희를 인도한 광활하고 위험한 광야는 불뱀과 전갈과

그는 물이 없는 척박한 땅을 통과했습니다.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시고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너를 낮추고 너를 시험하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함이니라”(신명기 8:15-16).

2. 주의 천사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출 3:2).

40년 동안 광야에서 보이지 않던 하나님이 마침내 여호와의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Stephen은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사십 년이 되었을 때에 천사가 시내 산 광야에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더니”(행 7:30).

시내산은 애굽이 아니라 미디안 땅에 있는 것 같습니다.

모세가 양떼를 인도하여 서쪽 광야를 지나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스데반은 또한 그것을 시나이 산의 광야라고 부릅니다.

당장은 이집트 시내산까지 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축복과 유업을 줄 때가 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때가 차매 여자에게서 나셨습니다.

모세도 40세에 천사가 나타나 게르솜(나그네)의 시대를 끝냈습니다.

때가 차자 요셉은 므낫세(잊혀짐)와 에브라임(번성)도 만들었다.

때가 차자 다윗도 시글락을 청산하고 헤브론으로 올라갔습니다.

왜 여호와의 천사, 그 천사가 떨기나무와 가시덤불 사이에 불꽃처럼 나타났습니까?

아마도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하나는 가시나무 떨기 시대인 모세의 광야 40년 동안에도 하나님이 항상 불꽃으로 그와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통은 혼자가 아닙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는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그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 같이 광야에서 네게 일어난 일이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걸어온 길에서 너를 안으시고 너를 이 곳으로 인도하셨느니라

그는 장막을 칠 곳을 찾아 당신 앞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가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갈 길을 네게 보이시느니라”(신명기 1:31-33).

그들은 항상 그들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난과 영광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믿고 의지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급을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영광은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지극히 크고 영원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가시덤불 사이에 나타난 천사의 또 다른 의미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가시덤불이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하나님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사람이 아무리 복되고 존귀한 옷을 입어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항상 가시덤불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시떨기나무임을 항상 인식하고 믿음으로 사는 한

하나님은 항상 타오르는 불꽃으로 여러분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높아졌다고, 많이 가졌다고 교만해지면 멸망이 문 앞에 닥칠 것입니다.

“마음의 교만은 패망의 앞잡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 18:12).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 22:4)

“시온의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의 강한 자들에게 화가 있을진저

지도자들, 백성들의 우두머리들,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른다 –

상아 상 위에 누워 수금 소리에 맞추어 노래하며 보배로운 기름을 몸에 바르며

요셉의 곤고함을 근심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암 6:1-6).

여호와의 말씀이 우리 일상에서 열매를 맺으려면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희락의 가시가 너희를 막지 말라.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켜 인내로 열매를 맺으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눅 14장).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 형제자매를 미워하지 않고 자기 목숨도 미워하지 않는 남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참된 레위인이 되기 위한 조건도 동일합니다(신명기 33장).

그는 부모님을 보지 못했고 형제들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의 아이들을 모른다.

이는 우리가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여호와의 언약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러한 참된 레위인만이 당신의 율례와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야곱에게 가르칩니다.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고 여호와의 제단에서 번제를 드릴 수 있습니다.

가시덤불 가운데서 나오는 불꽃,

주님의 제자는 참된 레위인이 되기 위한 조건을 주십니다.

이 덤불을 만들기 위해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고통의 받침대를 주십니다.

또한 고난의 연단과 그 끝과 끝은 타오르는 불꽃의 영광임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먼저 교훈으로 인도하시고 나중에는 영광으로 상을 주십니다.

“주의 조언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그 후에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내 육체와 마음은 없어지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니이다”(시 73:24-26).

모세가 가시나무를 줍던 날은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었던 날과 같도다

마치 요셉의 13년 환난과 같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25년을 기다린 날과 같습니다.

그러나 형이상학, ​​신앙의 신학, 4차원적 영성은 고통 없는 번영과 축복으로 유혹합니다.

삼. 네가 서 있는 곳은 신성한 땅이니 신발을 벗어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이리로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으라”(출 3:4-5).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을 제거한다는 것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남자는 모든 것의 구속 또는 교환을 확인하기 위해 샌들을 벗었습니다.

그 이웃에게 주매 그것이 이스라엘 중에 선례가 되었으므로 그 땅을 기업으로 받는 자는

보아스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으니라”(룻 4:7-8).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자신의 인격과 소유와 생명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발을 벗는 것은 그분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예는 신발을 신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신원이 노출되었습니다.

우리의 광야 생활도 하나님을 벗어버리는 과정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훈련의 과정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훈련 과정입니다.

자신의 의를 세우려 하고 하나님의 의를 거역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지식을 따라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도록 훈련하는 과정입니다.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실천하는 과정입니다.

당신이 서 있는 곳은 신성한 땅입니다.

가시덤불 위에서 불꽃이 타는 곳은 거룩한 땅입니다.

활활 타오르는 떨기나무 내 삶도 성스러운 땅.

이 신성한 땅에서는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여호수아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죽어야 하고 하나님만 계셔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러므로 내가 더 이상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셔야 합니다.

심리와 상담은 자기부정이 아니라 자존감을 높이는 지식이다.

그는 자신을 높이고 강화하고 확고하게 확립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

존경은 자기 소견에 옳은 것을 따르는 독선임을 알지 못하고,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흑암의 땅을 멸망의 땅으로 만드는 주범이라는 사실을 거의 알지 못합니다.

이 심리학을 기독교 상담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교회 성장을 위한 강력한 수단이자 영적 문제를 해결하는 주요 수단이기 때문에 장관입니다.

사람의 지혜와 지식은 아무리 뛰어나도 육신의 생각이므로 사망에 이르게 할 뿐입니다.

영의 생각만이 생명과 평안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의 지혜와 교훈과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떠나

우리가 초대 교회의 영적 전통으로 되돌려야 할 것은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뿐입니다.

자연의 땅과 분리된 땅, 가시덤불 사이에서 꺼지지 않고 타는 불의 땅,

우리는 거룩한 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성스러운 땅에서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을 밟아야 합니다.

왜 신을 벗지 않고 창조한 이론과 신학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합니까?

교회에서, 사람들과 함께, 당신이 우선 순위가 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개혁주의의 신발과 청교도의 신발을 모두 벗고 거룩한 땅에서만 신발을 벗어야 성경 일꾼이 됩니다.

오 하느님, 이 가시덤불에도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게 하소서!